♣나의 이야기♣/♣행복한 일상♣ (고궁 왕릉 )

♧수원화성 융릉산책♧

행 복 2020. 11. 24. 16:15

추존 장조~사도세자

사도세자능이정조대왕능보다웅장하다고
합니다

 

♧수원화성 융릉산책♧

 

정조가 아버지 능 (사도세자 )가는길에 송충이가 하도 많아서

참배하려가는긿에 우리 아버지 억울하게 죽은 것도 원통한데

무엇이 먹을 것이 있어서 송충이를 다씹어 먹었다는 야사도 전해진다고 합니다

그만큼 효도스련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흉년이 들어서 소나무 백성들이 갉아먹자 먹지못하게

거기에 콩주머니를 달아서

넣어서 백성들을 사랑했던 어진 군주 였다고 합니다

#융릉 추존 장조 와헌경왕후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

 

#홍살문

 

 

 

#금천교

 

 

 

 

 

 

 

 

 

 

 

 

 

 

 

오늘도 비밀의 정원 왕들의 정원을 공부하며 수원화성 건릉과 융릉 를 배우며

걸었습니다

 

#그녀의여행기
#자작글~-



♧왕릉 (융릉)
추존 장조의 황제와 헌경황후의능
(=합장릉입니다)

누군가가 추존이란무슨뜻이냐고제게언젠가

상당히오래됨 물어보더군요.죽어서 왕을
높여 부르는말 설명이맞냠 )
제21대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22대 정조선황제 생부입니다

어려서 부터 매우총명하여 글과시를 잘지었고
무예도뛰어났다고합니다

영조에게는 두분의왕후와 네분의 부인에게서 아들은2명딸은8명
정빈이씨에게서본
효장세자가 일찍죽어서 (파주 삼릉 영릉 에 잠들어계셔요 )

 

사도세자
1명 영빈이씨에게서얻었습니다
엄첨좋아했다고합니다

*헌경왕후 홍씨(혜경궁 홍씨)

사도세자 조선의왕세자이며서출

비운의 사형수.아버지에게서살해된인물
어머니에게서 죽임을청하고
조선의추존왕
대한제국의 추존황제





*이사진은설명을위해서네이버모셔온사진입니다
영조38년 나경언고변사건으로왕세자폐위
뒤주에갇혀 8일만에 굶고 세상을떠났다고합니다

영조나중에후회하고 애도하는뜻으로시호를사도세자
정조는 영조가떠나자 즉위하면서
나는사도세자의 아들이다하면서
존위를 장헌세자랴고 올렸으며

장종을거쳐 장조의 황제로추존
*폐세자되서 영우원터 배봉산에있다가
아들정조가 수원화성으로모셨다고합니다
어머니 영빈이씨터도 배봉산에있다가
수경원 서오릉에서 관람한것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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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를 검색하니출생레서
사망까지 모두읽어보았는데
송충이가출몰하여

나무를갉아먹어보기흉해서
정조가 내아비가 죽은것도 불쌍한데
어찌미물이 갉아먹느냐고

송충이를모두씹어 먹어 삼켰다는 야사도
전해진다고 합니다

그뒤부터은 송충이가 한마리도 안나왔다는설도 전해진다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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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릉~합장릉

영조는첫아들 효장세자를잃고 기쁜나머지2세레 왕세자가되고 정조즉위후 이곳으로 옮겨와서

현륭원이되었고 헌경왕후홍씨는 홍봉환의딸로 왕세자빈책봉 세자가떠난후 혜빈에 봉해졌고 정조 즉위후 혜경궁칭호를 올렸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잘알려진 한중록은 홍씨가 궁에
70년동안살면서 다소과장된것도 있을지 모르나 사실일수도 있다고합니다

사실혜경궁홍씨일찍 궁에들어와서
남편이 바람피고 유교사사상에 어긋나게
윗전의 궁녀와 내통하고 자식까지낳고


사도세자가 죽은것도 내친정뜻하고는 아무련 의미가 없다고 했다고합니다

정조하면 일등공신 홍봉한 빼놓을수없겠죠
*클릭해서읽어보셔요
#홍살문
박석
향로.어로

영조는마흔둘에 사도세자를얻다
효장세자를떠나보내고 7년간후사가없다가
세자는3살때부터 효경을읽 고썻다는기록전해진다고합니다
영조는아들의재능을높이샀으나
양위한다고 몇차례나 영조가대리청정을시켰다고합니다

영조가 우리가배울때는정치를잘한줄알았는데
왕릉을투어하며서 조선실록을 관심가지면서 컴프렉스와 유별난성격


당파싸움 노론과소론
사도세자가 지금으로치면 희대의살인마

사도세자를 뒤주에갇힌죄목은
정신질환으로 궁녀를죽인것 여승을궁녀를만든것 그리고 아무도몰래
20여일동안유람하고 수상한행동을한것


사도세자가진부채도 영조가 갚아주었다고합니다

궁안에 있으면서도 아버지가무서워
뵈안하지 않았다고합니다

옷입기도 싫어하고 한중록에 전해진다고합니다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눠가질수없다
영조의노여움커서 땅에조아린 세자의이마에 피가흐르고 자결을재촉하니
세자가 눈물로 호소하냐 영조끝내명을내려서 세자를폐서인하고뒤주에 가둬라


하지만 뒤주랴는정확한 기록은 없고
한중록에 쌀을담는 그릇이랴고 전해져서
뒤주랴고 한다고 한답니다
*수락간
융릉에는 정자각이 비슷하게있다고합니다
다른왕릉보다요

사람들이 갑쟈기우르르왕릉가로질려올라갔습니다
어 ~왜저래..금방이랴도사이렌울리고
호르라기울릴텐데

고궁이나 왕릉 음식물반입금지 돗자리물론
반려견마찬가지

저기로 길이있나..;;한사람두사람그제서야
차가올라가있는것 보고 공사하시는분들
금천교가아니고무슨다리였는데까먹었어요

*

*능이보이나 안보이나 올라가보다
정자각이닫혀있었어요
다른곳에서는능이보이던데요
#정자각
왕릉의관리와 제례준비를위한공간입니다


ㅇ*
길이좋아요
전세내다
융릉에는왕릉에서 보기드문연못곤신지가있다고 합니다
*

다음은 검색해본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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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하기전에 사도세자에 대해서 검색해본자료 캡쳐한내용일부
출처 네이버


아버지가 좀더 관심가지고사랑으로 대했다면살인까지
같은동복인

공주만좋아하고사도세자미워해서
쫒겨오고
그련가운데서도 세손공부만 열심히 한 정조


참으로 휼륭한군주이고 왕이될인재
영조가 매의눈으로 보았을까요
화성행궁 화령전에 봉안된 정조의초상화는
곤룡포가아닌 군복

정조는 생부가 희대의살인마라는게
싫어서 실록에 일부 찢겨워진 나간부분이
많다고합니다
사도세자 이후왕들은 대부분 사도세자혈족

고종은 엄첨 먼 왕족이랴고합니다

화성행궁다녀는왔는데 제가찍은것없러요
ㅠㅠㅠ
#조선왕조실록 115
경종 영조 12
- 사도세자(5)

세자와 영조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단계까지 와 있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 영조 37년(1761) 세자의 관서(關西)행입니다.

세자는 그 해 4월 2일부터 22일까지 관서(평안도) 지방을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직후인 5월 초, 서지수, 서명응이 세자를 면대해 아뢰었습니다.
- 저하께서 비록 궐 안에 계시더라도 일종 일정을 중외에서 모르는 경우가 없사온데 하물며 여러 날 동안 길을 떠난 경우이겠나이까
- 천리에 갔다가 오신 몸이면서도 아직도 지척의 진현(임금을 뵈알함)은 행하지 못하셨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말을 타고 달리는 예후이신데 아직도 아프다고 하신다면 사람들이 저하의 뉘우침을 의심할 것입니다.
- 관서행을 종용한 자, 관서행 뒤에 세자를 대신해 임금의 명에 비답한 내시를 회부해 죄를 밝히셔야 합니다.

세자는 관서로 여행을 떠나고서도 병이 났다며 내시로 하여금 임금께 올리는 비답을 대신 쓰게 하기 까지 한 것입니다.
세자는 신하들의 관서행 거론에 “대조(영조)께서 아시도록 하려는 수작이 아니냐”며 불만과 불안의 기색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영조가 이 일을 알게 된 것은 몇 달이 지난 그 해 9월이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을 파악한 영조는 뜻밖에도 승지들과 관원들을 벌주는 선에서 이 일을 조용히 덮었습니다. 더 이상 실망할 것도 없다는 느낌입니다.

조선 왕실의 가장 비참한 사건 중 하나인 임오화변은 1762년(영조 38년) 5월 13일에 일어났습니다.


이 날 실록의 기록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세자의 천품과 자질이 탁월해 임금이 매우 사랑했는데, 10여 세 뒤부터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청정한 뒤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天性)을 잃었다.

임오화변의 직접적인 계기는 비극 20여 일 전에 제기된 나경언의 고변이었습니다(5월 22일). 이 사건은 나경언이라는 사람이 세자의 비리를 영조에게 고변했다가 무고 혐의로 참형에 처해진 것입니다.

세자가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대죄하자, 영조는 세자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 네가 왕손의 어미를 때려죽이고 여승을 궁으로 들였으며 북성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세자가 행할 일이냐
- 왕손의 어미가 죽은 것은 네 행실을 지적했기 때문이 아니냐.
영조는 나경언의 고변으로 세자의 여러 비리를 더욱 상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실록에는 이틀 뒤 영조가 시전 상인들을 불러 세자가 진 빚을 갚아주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세자가 유희에 내사를 모두 탕진해 시전에서 많은 돈을 빌려 썼고, 이를 갚지 않아 시전의 원망이 컸기 때문입니다.

(조선왕조실록)모셔온글입니다

자~미흡하지만관람은잘하셨나요
한번더 복습하쟈면

수원화성에는
융릉~합장능
처음엔정조즉위하면서 현륭원
*사도세자와혜경궁홍씨(추존장조황제와헌경왕후의능(

융륭연혁

*1789년(정조13년)배봉산지금동대문구휘경동 영우원지금의자리로 옮김 현륭원이라부름.
*1816년(순조16)헌경왕후 홍씨합장


*1899년(광무3)장종으로 추존융릉으로높임 장조의 황제로추존


건릉~합장능
조선 제 22대정조선황제와 효의선황후의능


*1800년(정조24)정조안장현륭원동쪽두번째조성(초장)
*1821년(순조21)현륭원 서쪽산줄기지금의자리로 천장효의선황후와합장



관람시켜드렸습니다
이해는 하셨나요


140년된향나무
입장마감시간
재실
주차장 차없음.ㅋㅋ
*
*역사는지금도흐른다
*
주차장입니다 텅텅빔대형버스주차장
지루하셨나요
지금까지수원화성 융릉과 건릉보여드렸습니다

다음엔 수원화성을 보여드릴께요
잘 따라오셔요 오기싫으면 말고요
장문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론 정보가 차이가 날수도 있고

오타도 발생합니다 차이가 나면 알려주셔요 즉시 수정 정정 하겠습니다

*내가찾아간방법
대중교통 1호선 병점역 2번출구나가서
버스 34번승차
융릉과건릉앞하차

더욱자세한교통편 건릉편참고하셔요
*일행2명
2020년 11.22일 융릉과 건릉을다녀오고나서